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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부성 보호 감정선

by 건강백서랩 2025. 12. 23.

영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거친 액션과 추격이 전면에 있지만, 시선을 끝까지 붙잡는 건 총성과 속도가 아니라 인남이라는 인물이 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감정선입니다. 처음엔 냉정한 해결사처럼 보이던 사람이 어떤 사실을 마주한 뒤부터는 판단의 기준이 바뀌고, 그 변화의 핵심에 부성이 놓입니다. 여기서 부성은 다정한 가족 서사로 단정되지 않고, 늦게 도착한 책임과 죄책감이 뒤엉킨 형태로 드러납니다. 보호 역시 누군가를 살리는 선택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또 다른 위험을 부르는 약점이 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누가 옳은가”보다 “누군가를 지키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인생이 어떻게 기울어지는가”를 더 가까이 보여줍니다. 액션이 격해질수록 감정은 더 조용해지고, 그 조용함이 오히려 관객의 마음을 무겁게 누르며 긴 여운을 남깁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감정선이 쌓이는 방식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감정선은 친절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남은 감정을 말로 정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먼저 해버리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초반에는 그가 단단한 프로처럼 보이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단단함이 사실은 감정을 누르는 기술이라는 게 드러납니다. 감정선이 본격적으로 살아나는 지점은 눈물이나 고백 같은 장면이 아니라, 인남이 선택의 문턱에 설 때마다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달라지는 순간들입니다. 누군가를 위해 움직인다는 말은 쉬운데, 실제로는 움직이는 내내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납득시켜야 합니다. 인남은 납득이 끝나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움직이면서 납득을 만들어내려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감정선은 곧 책임으로 변하고, 책임은 곧 속죄처럼 굳어집니다. 이 작품이 강한 이유는, 인남을 정의로운 영웅으로 세워두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가 가진 과거와 폭력의 흔적이 인남을 멋있게 만들어주기보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반복해온 사람의 피로감을 더 짙게 남깁니다. 그래서 관객은 액션의 통쾌함보다 “이 사람이 더 앞으로 가면 무엇을 잃게 될까”를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감정선은 그 질문에서 자랍니다. 또한 감정선이 생기면 관계의 결이 달라집니다. 인남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누군가의 손을 받아들이는 장면들은 단순한 협업이 아니라, 자기 세계의 경계를 한 칸 열어두는 행동처럼 느껴집니다. 원래 인남은 혼자 해결하는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인데, 영화는 그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그때 인남은 싫든 좋든 타인의 시선과 감정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감정선은 거기서 더 선명해집니다. 내가 가진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내가 지키려는 대상이 생기면 기술은 도구가 아니라 부담이 됩니다.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는 만큼, 살리지 못했을 때의 후회도 커지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그 후회를 미리 보여주지 않고, 인남의 걸음이 점점 급해지는 방식으로만 쌓아 올립니다. 급해진 걸음은 곧 심리적 시간제한이 되고, 시간제한은 판단을 날카롭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사람을 무모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감정선은 ‘따뜻함’이 아니라 ‘각오’에 가까운 색으로 남습니다. 인남이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할수록, 관객은 오히려 그 감정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더 잘 보게 됩니다.

부성이 늦게 도착했을 때 생기는 압력

이 영화에서 부성은 기저귀를 갈고 등을 두드려주는 장면으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성은 “늦었는데도 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등장합니다. 준비된 부성은 일상 속의 돌봄으로 드러나지만, 준비되지 않은 부성은 한 번의 결단으로 삶을 흔드는 형태가 되기 쉽습니다. 인남에게 부성은 갑자기 찾아온 감정이라기보다, 회피해온 진실이 더 이상 회피되지 않는 순간에 생기는 책임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 감정은 아름답다기보다 비장합니다. 비장은 사랑의 과잉이 아니라, 뒤늦게야 책임을 감당하려는 사람의 절벽감에서 나옵니다. 절벽감이 생기면 선택의 기준이 바뀝니다.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이 아니라 ‘가장 덜 후회할 선택’을 고르게 되고, 그 덜 후회할 선택은 대개 더 위험하고 더 고통스러운 길일 때가 많습니다. 부성이 무모함으로 보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마음은 숭고해 보이지만, 그 마음이 폭력의 언어를 빌려야 하는 상황에서는 관객도 쉽게 편해지지 않습니다. 영화는 그 불편함을 의도적으로 남깁니다. 부성이라는 단어가 따뜻한 장식이 되는 순간, 이 작품의 잔혹함은 단순한 스타일로 소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영화는 부성을 ‘인남이 떠안는 비용’으로 다룹니다. 누군가를 지키려 하면 할수록 인남은 더 깊은 위험으로 들어가고, 그 위험은 물리적 위협뿐 아니라 자기 안의 죄책감을 자극합니다. “내가 지금이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은 동시에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했나”라는 질문을 끌어오고, 그 질문은 사람을 쉽게 잠들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인남의 부성은 다정함이 아니라 불면에 가까운 표정으로 남습니다. 또한 부성은 관계의 권력도 드러냅니다. 보호를 명분으로 삼으면, 상대의 선택을 대신해버릴 위험이 생기고, 그 위험은 좋은 의도에서도 발생합니다. 영화 속 인남은 그 경계를 늘 정확히 지키는 인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고, 관객은 그 몰림 속에서 “부성은 감정이 아니라 책임의 방식”이라는 사실을 다시 보게 됩니다. 책임의 방식이란 결국,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남길 흔적까지 감당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인남은 그 태도를 말로 정리하지 못하지만, 몸으로 보여주려 합니다. 몸으로 보여주는 책임은 대가가 큽니다. 그래서 부성은 영화에서 희망이라기보다 결심으로 기능하고, 그 결심이 커질수록 장면은 더 잔혹해지면서도 이상하게 더 인간적으로 보입니다.

보호가 구원이 되지 못할 때 남는 것

보호는 보통 “살려냈다”는 결과로 평가되지만, 이 영화는 보호가 언제나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집요하게 남깁니다. 보호는 대상이 생기는 순간 곧바로 약점이 되고, 약점이 생기면 상대는 그 약점을 이용합니다. 그래서 보호는 단순히 몸을 막아주는 행위가 아니라, 판의 규칙을 바꾸는 행위입니다. 인남이 보호를 선택한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가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의 긴장감은 총격이나 추격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옵니다. 지키겠다는 마음은 방향을 만들어주지만, 동시에 되돌아갈 길을 지워버립니다. 그래서 보호는 아름다운 미덕이라기보다 위험한 선언처럼 느껴집니다. 관객이 불편해지는 지점도 바로 여기입니다.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폭력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보호는 선과 악의 경계를 단순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오히려 경계를 흐리게 하고, 그 흐림 속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기도, 스스로를 혐오하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 복잡함을 한쪽으로 밀어붙이지 않습니다. 인남이 보호를 선택하는 순간들이 감동의 장면이기보다는, “이 선택이 결국 무엇을 남길까”라는 질문을 남기는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호가 끝까지 성공해도 상처는 남습니다. 보호가 실패하면 상처는 더 깊어집니다. 이 작품은 그 둘 중 어느 쪽을 택해도 인간의 마음이 깔끔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통쾌함을 크게 주지 않습니다. 대신 보호가 남긴 잔상, 즉 한 사람이 끝내 외면하지 않으려 했던 마음의 흔적을 남깁니다. 그 흔적은 “내가 누군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하고, “그 무엇을 하는 동안 나는 무엇이 되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보호는 누군가를 살리지만, 동시에 나를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영화 속 인남은 보호를 선택하면서 더 강해지는 게 아니라, 더 무거워집니다. 더 무거워진 사람은 쉽게 웃지 못하고, 쉽게 쉬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보호를 멈추지 않는 이유는, 멈추는 순간 자기 자신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이 남기는 구원은 그래서 ‘완벽한 회복’이 아니라 ‘더 나빠지던 방향을 잠깐이라도 멈추는 일’에 가깝습니다. 보호가 구원이 되지 못하더라도, 보호를 선택한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 그게 이 영화의 끝에 남는 묵직함입니다.